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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명 '조선왕 조'◑'조선왕 계보'

조선왕조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근세사회를 연 조선왕조 계보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은 1910년 순종을 마지막으로 27명의 왕이 계승해 519년간 존속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은 1910년 순종을 마지막으로 27명의 왕이 계승해 519년간 존속했다. 조선은 왕과 양반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정국을 이끌어갔다. 조선은 관리의 등용에 있어 능력을 중시하고, 삼사三使를 두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는 중인과 서민들에게도 문화의 폭이 넓어지는 등 전조의 고려에 비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근세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우군도 도리 심부름으로 요동 정벌을 위한 북진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정도전(정·도죠은)등 새 진사 대부 세력과 손 잡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이·성게)은 1392년 고려 공양 왕을 양위하고 스스로 태조가 되었다.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긴 뒤 도성을 쌓고 도로와 관청, 시장, 학교 등을 건설해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 Gray _ Rhee , 출처 Pixabay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3대 태종은 사병제도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의금부를 설치하고 법사제도를 정비하였다.사간원을 독립시켜 장관들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였고, 호패법으로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국경을 튼튼히 하였다.

나라의 기틀을 안팎으로 다진 태종의 노력으로 제4대 임금인 세종은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세종은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고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달력을 제작하며 아악을 정리하는 등 조선의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대에는 잘 알려진 황희나 맹사성 같은 훌륭한 재상을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고,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가 꽃을 피웠다.

국방에 있어서도 김종서의 4군 6진 개척으로 국토가 확장되는 등 다방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올렸다. 이후 20년간 세자로서 세종을 보좌하던 문종이 일찍 사망했고 이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제7대 왕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장악했다.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고,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했으며, 중앙군 제도를 개편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9대 왕 성종은 세종과 세조의 치적을 바탕으로 문물제도 정비를 완비함과 동시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본이념과 방향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세종 때의 집현전 격인 홍문관을 설치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도 했다. 이후 즉위한 10대 왕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회문제를 일으켜 폭정을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왕되었다.

중종과 인종, 명종을 거쳐 즉위한 14대 임금 선조 때에는 당파간 혼란과 동시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발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선조가 의주까지 피신하는 등 수세에 몰렸으나, 의병과 이순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일본을 물리친 조선은 15대 광해군에 이르러 전후 복구사업에 주력하였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유배되고 16대 임금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 jeesungkim 9 9 , 출처 Unsplash

송시열과 송준길 등 대학자가 잇따라 배출되었지만 당파간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붕당간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왕권도 불안해졌다. 이에 19대 숙종은 국왕이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조절하기 위한 탕평책을 펴는 한편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이어 21대 영조 때에도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폐해를 완화하는 한편 민생안정과 산업진흥을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영조는 속대전 등을 편찬하여 법치체제를 재정비하고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 힘썼다. 또 균역법을 시행해 청계천을 준설하고 사치풍조를 금지하는 각종 조치를 취하는 등 재위 기간 중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어 즉위한 제22대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을 지탱할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숙종과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100여 차례의 대궐 밖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했으며, 중하급 관리 중에서도 유능한 인물을 직접 선발해 국정운영을 맡겼다.

© estersthetic , 출처 Unsplash

그러나 정조 사후 60여 년간 왕의 외척세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정치가 펼쳐지면서 각종 비리와 탈세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대내적으로는 세력정치에 저항하는 민중세력이 급격히 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문호개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편 외국과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확고히 했다. 26대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친정하여 개항하면서 문을 열었다.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고종은 일련의 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위정척사파의 반대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운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905년 을사 조약에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1910년 대한 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1907년 즉위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재위 3년 만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아 519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의 종언을 맞았다.

역대 조선왕 - 1392~1910 유교적 민본주의에 입각하여 근세사회를 연 조선왕조의 계보 (네이버)